카헤티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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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헤티 왕국은 15세기 조지아 왕국의 분열 과정에서 등장하여, 동부 조지아의 알라자니 강과 이오리 강 계곡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비단길에 인접하여 상업 활동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의 위협 속에서 균형 외교를 펼쳤다. 17세기 초, 이란의 지배를 받으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끊임없는 저항과 봉기를 통해 독립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18세기에는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점령을 겪었지만, 테이무라즈 2세와 에레클레 2세의 노력으로 독립을 회복하고 카르틀리 왕국과 통합하여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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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헤티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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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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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კახეთის სამეფო (카헤티스 사메포) |
일반 명칭 | 카헤티 왕국 |
국가 유형 | 군주제 |
정치 체제 | 봉건군주제 |
존속 기간 | 1465년 ~ 1762년 |
수도 | 그레미 (1465년 ~ 1664년) 텔라비 |
공용어 | 조지아어 (고전학) 페르시아어 (고전학) |
종교 | 정통 기독교 유대교 시아파 |
통화 | 불명 |
역사 | |
주요 사건 | 건국: 1465년 조지아 (카르틀리)의 독립 인정: 1490년 페르시아의 봉신국: 1555년 ~ 1578년; 1612년 ~ 1723년; 1736년 ~ 1747년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1578년 ~ 1612년; 1723년 ~ 1736년 카르틀리-카헤티 연합: 1762년 |
이전 국가 | 조지아 왕국 |
이후 국가 | 카르틀리-카헤티 왕국 엘리수 술탄국 |
정치 | |
지도자 칭호 | 왕 |
주요 지도자 | 조지 1세 (초대): 1465년 ~ 1476년 헤라클리우스 2세 (말대): 1744년 ~ 1762년 |
기타 | |
현재 국가 |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러시아 |
2. 초기 역사
카헤티 왕국의 발생은 15세기 중반부터 조지아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분열로 나가는 첫 단계였다. 게오르게 8세는 왕위 강탈자가 되어, 1465년에 삼츠헤의 공작이자 왕에게 도전한 신하 큐바르큐바레 3세에게 사로잡혔고, 바그라트 6세가 우위에 서면서 폐위되었다. 그 후 그는 알라자니와 이오리강 계곡을 중심으로 한 조지아의 가장 동쪽 지방인 카헤티에 독립 통치 체제를 구축했고, 1476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반(反)왕 태도를 고수했다.[3]
이러한 난관으로 인해, 축소된 조지아의 왕 콘스탄티네 2세는 새로운 통수권 승인을 강요받았다. 1490년에 게오르게 8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1세를 동부 카헤티의 왕으로, 1491년에 바그라트 6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2세를 이메레티 왕국의 왕으로 인정하여 조지아 왕국은 3분할되었다.[4]
카헤티는 다른 조지아의 정치 조직들과는 달리, 당분간 주요 외국의 침입과 중대한 내부 반란을 모면했다. 또한 길란-셰마카-아스트라한을 잇는 비단길에 인접해 있어, 카헤티 정부는 이 사업을 후원하고 활발하게 참여했다. 카헤티의 비옥한 토지는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그레미, 자게미, 카라가지, 텔라비의 상업 도시들과 페르시아 식민지들을 번영시켰다. 이 기간 동안의 관계 안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귀족 지지자들의 수를 증가시켰다.[5]
오스만과 사파비조의 위협에 직면한 카헤티의 왕은 균형 정치를 펼치며, 남캅카스에서 타르키의 삼할에 대항하여 무스코비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1555년 아마시아에서의 오스만-사파비조 간 평화 논의로 카헤티는 사파비조 이란의 영향권에 남게 되었지만, 상당한 독립성과 안정성을 유지했다. 1589년, 카헤티의 알렉산데르 2세는 표도르 2세에게 충성을 서약했지만, 동맹은 실제로 실시되지 않았다. 1605년, 무슬림으로 개종한 아들 콘스탄티네 1세가 이란의 지시로 부친 알렉산데르를 살해하면서 카헤티의 운명은 바뀌기 시작했다. 카헤티 사람들은 부친 살해범을 거부하고 그를 타도했으며, 사파비조 샤흐 아바스 1세는 1606년에 콘스탄티네의 조카 테이무라즈 1세를 새 왕으로 지목했다. 이로써 사파비조와의 충돌 속에서 테이무라즈의 길고 험란한 통치 기간(1605~1648년)이 시작됐다.[6]
2. 1. 분열의 시작
15세기 중반부터 조지아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카헤티 왕국의 등장은 분열로 나가는 첫 단계였다. 게오르게 8세는 왕위 강탈자였는데, 1465년에 삼츠헤의 공작이자 반항적인 신하였던 큐바르큐바레 3세에게 사로잡혀 바그라트 6세에게 폐위되었다. 이후 그는 알라자니와 이오리강 계곡을 중심으로 한 조지아의 가장 동쪽 지방인 카헤티에 독립 통치 체제를 구축했고, 1476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반(反)왕의 태도를 고수했다.[3]이런 난관에 당황한 조지아의 왕 콘스탄티네 2세는 새로운 통수권 승인을 강요받았다. 그는 1490년에 게오르게 8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1세를 동부 카헤티의 왕으로, 1491년에 바그라트 6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2세를 이메레티의 왕으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조지아 왕국은 3분할되었다.[4]
2. 2. 독립 왕국 성립
조지아가 15세기 중반부터 골육상잔의 비극에 휘말리게 되면서, 카헤티 왕국의 등장은 분할로 나가는 첫 단계였다. 1465년, 왕위 강탈자였던 게오르게 8세는 도전적인 신하 삼츠헤의 공작 큐바르큐바레 3세에게 생포되었고, 바그라트 6세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그는 알라자니와 이오리강 계곡을 중심으로 한 조지아의 가장 동쪽 지방인 카헤티에 독립 통치 체제를 구축, 1476년 사망할 때까지 반(反)왕 태도를 고수했다.[3]이러한 난관에 직면한 콘스탄티네 2세는 새로운 통수권을 승인해야 했다. 1490년, 그는 게오르게 8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1세를 동부 카헤티의 왕으로, 1491년에는 바그라트 6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2세를 이메레티 왕국의 왕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조지아 왕국은 3분할되었다.[4]
다른 조지아의 정치 조직들과 달리, 카헤티는 당분간 주요 외국의 침입과 내부 반란을 모면했다. 또한 길란-셰마카-아스트라한을 잇는 비단길에 인접해 있어, 카헤티 정부는 이 사업을 후원하고 활발하게 참여했다. 카헤티의 비옥한 토지는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그레미, 자게미, 카라가지, 텔라비의 상업 도시들과 페르시아 식민지들을 번영시켰다. 이 기간 동안의 관계 안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귀족 지지자들의 수를 증가시켰다.[5]
오스만과 사파비조의 위협에 직면한 카헤티의 왕은 균형 정치를 펼치며, 남캅카스에서 타르키의 삼할에 대항하여 무스코비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1555년 아마시아에서의 오스만-사파비조 간 평화 논의로 카헤티는 사파비조 이란의 영향권에 남게 되었지만, 상당한 독립성과 안정성을 유지했다. 1589년, 카헤티의 알렉산데르 2세는 표도르 2세에게 충성을 서약했지만, 동맹은 실제로 실시되지 않았다. 1605년, 무슬림으로 개종한 아들 콘스탄티네 1세가 이란의 지시로 부친 알렉산데르를 살해하면서 카헤티의 운명은 바뀌기 시작했다. 카헤티 사람들은 부친 살해범을 거부하고 그를 타도했으며, 사파비조 샤흐 아바스 1세는 1606년에 콘스탄티네의 조카 테이무라즈 1세를 새 왕으로 지목했다. 이로써 테이무라즈의 길고 험란한 통치 기간(1605~1648년)이 시작됐다.[6]
게오르기 2세 사후, 카헤티는 인접한 카르틀리 왕국을 여러 차례 침략하여 약화시켰고, 결국 카르틀리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레반은 9세의 나이에 카르틀리인에게 붙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카헤티 산악 지대로 옮겨졌다. 이란의 샤 이스마일 1세가 카르틀리를 침략한 후, 레반을 산으로 데려온 귀족들은 레반을 카헤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2년간의 전쟁 끝에 카르틀리는 카헤티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카헤티의 독립을 인정했다.
3. 16세기 카헤티
카헤티 왕국은 15세기 중반 조지아가 분열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게오르게 8세는 왕위 강탈자였으나, 1465년 삼츠헤의 공작 큐바르큐바레 3세에게 생포되어 바그라트 6세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그는 알라자니와 이오리강 계곡을 중심으로 한 카헤티 지역에 독립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1476년 사망할 때까지 반-왕의 태도를 고수했다.[3]
이러한 혼란 속에, 조지아의 왕 콘스탄티네 2세는 1490년에 게오르게 8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1세를 동부 카헤티의 왕으로, 1491년에 바그라트 6세의 아들 알렉산데르 2세를 이메레티의 왕으로 인정하면서 조지아 왕국은 셋으로 나뉘게 되었다.[4]
3. 1. 번영과 안정

다른 조지아의 정치 체제와 달리 카헤티는 당분간 주요 외국 침략과 심각한 내부 불안으로부터 벗어났다. 더욱이, 길란-셰마하-아스트라한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실크 로드"를 접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조지아 지역보다 유리했다. 카헤티 정부는 이 무역을 후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왕국을 동부 트란스코카서스와 이란의 경제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했다. 카헤티의 광범위하게 경작된 비옥한 토지는 그레미, 자게미, 카라가지, 텔라비 등 무역 도시의 활기찬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및 페르시아 식민지와 결합하여 분열된 조지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번영을 가져왔다. 이 상대적인 안정은 한동안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지지자 수를 늘렸다.[5]
떠오르는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에 위협을 느낀 카헤티 왕들은 신중하게 균형 외교를 펼치며, 북캅카스의 타르키 샴칼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의 같은 종교를 가진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 1555년 아마시아에서 체결된 오스만-사파비 평화 조약으로 카헤티는 사파비 이란의 영향권 안에 놓였지만, 지역 통치자들은 사파비의 지배자들과 협력하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상당한 독립성과 안정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89년, 알렉산더 2세는 공식적으로 차르 표도르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 동맹은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다. 1605년 알렉산더가 자신의 아들인 무슬림 개종자 콘스탄틴 1세가 주도한 이란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살해되면서 카헤티의 운명은 바뀌기 시작했다. 카헤티 사람들은 존속 살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를 몰아냈으며, 이에 사파비의 강력한 샤 아바스 1세는 마지못해 반군의 지명자이자 콘스탄틴의 조카인 테이무라즈 1세를 1605년에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테이무라즈의 길고 힘든 통치(1605–1648)가 사파비와의 갈등 속에서 시작되었다.[6]
3. 2. 외세의 위협과 대응
오스만과 사파비조라는 동양의 대 제국들이 출현하여 위협을 느끼자, 카헤티의 왕은 균형 외교를 펼치며, 남캅카스의 타르키의 샴할에 대항하여 모스크비의 같은 종교를 믿는 통치자와 동맹을 맺으려고 노력했다. 1555년에 아마시아에서 오스만-사파비조 간의 평화 논의로 카헤티는 사파비조 이란의 영향권 범위 안에 남겨지게 됐지만, 지방 통치자는 그들의 사파비조 대군주에게 기꺼이 협력할 의사를 표명함으로 상당한 독립성과 안정성이 유지되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1589년에 알렉산데르 2세는 차르에게 충성을 공적으로 서약했지만, 사실상의 동맹은 단 한 번도 실제로 실시되지는 않았다. 1605년 무슬림으로 개종한 아들 콘스탄티네 1세에 의해 자행된 이란측 지시의 일격에 의한 부친 알렉산데르의 살해로, 카헤티의 운명은 거꾸로 가기 시작했다. 카헤티 사람들은 부친살해범을 받아들이기 거부했으며 그를 타도했고, 사파비조 샤흐 아바스 1세가 마지못해 반역의 가담자로 그를 지목했고 1506년에 콘스탄티네의 조카 테이무라즈 1세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파비조와의 충돌속에서 테이무라즈의 길고도 험란한 통치 기간(1605~1648년)이 시작됐다.[6]다른 조지아의 정치 체제와 달리 카헤티는 당분간 주요 외국 침략과 심각한 내부 불안으로부터 벗어났다. 더욱이, 이곳은 중요한 길란-셰마하-아스트라한 "실크 로드"를 접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조지아 지역보다 유리했다. 카헤티 정부는 이 무역을 후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왕국을 동부 트란스코카서스와 이란의 경제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했다. 카헤티의 광범위하게 경작된 비옥한 토지는 그레미, 자게미, 카라가지, 텔라비 등 무역 도시의 활기찬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및 페르시아 식민지와 결합하여 분열된 조지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번영을 가져왔다. 이 상대적인 안정은 한동안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지지자 수를 늘렸다.
4. 이란의 패권
1610년대 중반, 샤 아바스 1세는 조지아를 사파비 제국으로 더욱 확실하게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재개했고, 1614년부터 1617년까지 반복되는 침략으로 카헤티를 종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조지아의 반란과 이란의 보복으로 6만~7만 명이 살해당했고, 10만 명 이상의 카헤티인 농민들이 이란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카헤티의 인구는 3분의 2로 감소했고, 그레미, 자게미와 같이 한때 번성했던 도시들은 작은 마을로 축소되었으며, 농업은 쇠퇴하고 상업은 정체되었다.[7]
1648년, 끈질긴 카헤티의 테이무라즈 1세는 마침내 카헤티에서 축출되었다. 사파비 정부는 카헤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토착 인구를 유목민 투르크 부족으로 대체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같은 시기에 다게스탄 산악인들이 카헤티 변경 지역을 공격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1659년, 카헤티인들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유목민들을 학살하고, 카르틀리의 바흐탕 5세에게 나라를 인도했다. 바흐탕 5세는 샤의 허가를 받아 아들 아르칠을 카헤티의 왕으로 즉위시켰다. 한동안 동부 조지아의 두 왕국은 바흐탕 5세와 그의 아들 아래 사실상 통일되었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아르칠은 텔라비를 수도로 삼고 재건 계획을 시행했으나, 이 상황은 무크라니 가문과 카헤티 왕가의 경쟁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카헤티 왕가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대가로 1703년에 가문을 재건하여 왕위를 계승했고, 사파비 종주국의 기쁨을 누리며 통치했다. 그러나 왕국은 끊임없는 다게스탄의 침입으로 계속해서 고통받았다.
1724년부터 1744년까지 카헤티는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연이은 점령을 받았다. 그러나 테이무라즈 2세가 이란의 나데르 샤에게 협조하여 1743년에 카헤티가 이란에 바치던 과중한 공물 납부를 무효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45년, 테이무라즈 2세와 에레클레 2세는 기독교 전례에 따라 왕관을 썼다. 그들은 1747년 나데르 샤 암살 이후 이란의 혼란을 틈타 독립적인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1762년 테이무라즈 2세가 죽자 에레클레 2세가 그를 계승하여 동부 조지아는 단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8]
4. 1. 사파비 제국의 침략

1610년대 중반, 샤 아바스 1세는 조지아를 사파비 제국으로 더욱 확실하게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재개했고, 1614년부터 1617년까지 반복되는 침략으로 카헤티를 종속시켰다. 조지아의 반란과 이란의 보복으로 6만~7만 명이 살해당했고, 10만 명 이상의 카헤티인 농민들이 이란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카헤티의 인구는 3분의 2로 감소했다. 그레미, 자게미와 같이 한때 번성했던 도시들은 작은 마을로 축소되었고, 농업은 쇠퇴하고 상업은 정체되었다.[7] 1648년, 끈질긴 테이무라즈 1세는 마침내 카헤티에서 축출되었다. 사파비 정부는 카헤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토착 인구를 유목민 투르크 부족으로 대체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같은 시기에 다게스탄 산악인들이 카헤티 변경 지역을 공격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1659년, 카헤티인들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유목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나라를 바흐탕 5세 샤흐-나와즈에게 인도했다. 샤흐-나와즈는 샤의 허가를 받아 아들 아르칠을 카헤티의 왕으로 즉위시켰다. 한동안 동부 조지아의 두 왕국은 샤흐-나와즈와 그의 아들 아래 사실상 통일되었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이란의 침략으로 파괴된 그레미 대신 텔라비를 수도로 삼은 아르칠은 재건 계획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유망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르칠의 카헤티 즉위는 무크라니 가문과 왕위를 빼앗긴 카헤티 왕가의 두 바그라티오니 분파 사이의 경쟁의 시작을 알렸다. 카헤티 왕가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대가로 1703년에 가문을 재건하여 결국 왕위를 계승했고, 그들의 사파비 종주국의 기쁨을 누리며 통치했다. 그러나 왕국은 끊임없는 다게스탄의 침입으로 계속해서 고통받았다.
1724년부터 1744년까지 카헤티는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연이은 점령을 받았다. 그러나 테이무라즈 2세가 이란의 나데르 샤에게 협조하여 1743년에 카헤티가 이란에 바치던 과중한 공물 납부를 무효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45년, 두 군주는 모두 기독교 전례에 따라 왕관을 썼다. 그들은 1747년 나데르 샤 암살 이후 이란의 혼란을 틈타 스스로를 독립적인 통치자로 확립했다. 그들의 통치는 나라의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다게스탄의 공격은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 1762년 1월 8일 테이무라즈가 죽자 에레클레 2세가 그를 계승하여 동부 조지아는 단일 왕국으로 통합되었다.[8]
4. 2. 저항과 좌절
1610년대 중반, 샤 아바스 1세는 조지아를 사파비 제국에 완전히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재개했고, 카헤티는 1614년, 1615년과 1616년에 반복적인 침략을 받았다.[7] 조지아의 반란과 이란의 보복으로 6만~7만 명이 사망했고, 10만 명 이상의 카헤티 농민들이 이란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카헤티의 인구는 3분의 2로 감소했으며, 한때 번성했던 그레미와 자게미와 같은 도시는 작은 마을로 축소되었고, 농업은 쇠퇴하고 상업은 정체되었다.[7] 1648년까지 끈기 있는 카헤티의 테이무라즈 1세()는 마침내 카헤티에서 축출되었다. 사파비 정부는 카헤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토착 인구를 유목 투르크 부족으로 대체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동시에 다게스탄 산악인들이 카헤티 변경 지역을 공격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1659년, 카헤티인들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수만 명의 투르크멘인을 카헤티에 정착시키려는 사파비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카헤티는 여전히 이란의 정치적 통제하에 있었고, 봉기의 세 명의 귀족 지도자들은 항복하여 처형되었다. 몇 년 후, 카르틀리의 바흐탕 5세 샤-나와즈는 무슬림 조지아 왕이자 카르틀리의 발리로서 샤의 허가를 받아 아들 아르칠을 카헤티의 왕/발리로 임명할 수 있었다. 한동안 동부 조지아의 두 왕국은 샤-나와즈와 그의 아들 아래 사실상 통일되었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이란의 침략으로 파괴된 그레미() 대신 텔라비를 수도로 삼은 아르칠은 재건 계획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유망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르칠의 카헤티 즉위는 두 바그라티오니 가문, 즉 아르칠이 속한 무흐라니 가문과 카헤티의 테이무라즈 1세의 인물에서 왕관을 빼앗긴 카헤티 가문 사이의 경쟁의 시작을 알렸다.
1677년부터 1703년까지 바그라티오니 왕조는 카헤티 왕위를 잃었고, 카헤티는 다시 직접적인 사파비 통치를 받게 되었다. 카헤티 가문은 마침내 이슬람으로의 배교를 대가로 1703년에 스스로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사파비 종주국의 뜻에 따라 통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왕국은 끊임없는 다게스탄의 침략으로 계속 괴로워했다.
1724년부터 1744년까지 카헤티는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연이은 점령을 받았다. 그러나 카헤티 공작 테이무라즈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에서 이란의 나데르 샤에게 제공한 공헌은 1743년 카헤티가 이란 궁정에 지불한 무거운 조공을 무효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744년,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나데르는 테이무라즈 2세에게 카르틀리 왕국을, 그의 아들 에레클레 2세에게는 카헤티 왕국을 수여했다. 두 군주는 1745년 기독교 전통에 따라 즉위했다. 그들은 1747년 나데르의 암살 이후 이란의 혼란을 이용하여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그들의 통치는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경제는 부활하기 시작했으며, 다게스탄의 공격은 감소했지만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 테이무라즈가 1762년 1월 8일에 사망했을 때, 에레클레 2세가 그 뒤를 이었고, 그리하여 거의 3세기 만에 처음으로 동부 조지아를 단일 국가로 통합하여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8]
4. 3. 카르틀리와의 관계
1610년대 중반, 샤 아바스 1세는 조지아를 사파비 제국에 더 완전히 편입하려는 시도를 재개했고, 카헤티는 1614년, 1615년과 1616년에 반복적인 침략을 받았다.[7] 조지아의 반란과 이란의 보복으로 6만에서 7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고, 10만 명 이상의 카헤티 농민들이 이란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카헤티의 인구는 3분의 2로 감소했으며, 한때 번성했던 그레미와 자게미와 같은 도시는 작은 마을로 축소되었고, 농업은 쇠퇴하고 상업은 정체되었다.[7] 1648년까지 끈기 있는 카헤티의 테이무라즈 1세는 마침내 카헤티에서 축출되었다. 카헤티는 이후 로스톰 (로스탐 칸)의 통치를 받았는데, 그는 카르틀리의 '발리'(총독)였다. 그러나 로스톰의 통치는 명목상에 불과했는데, 카헤티의 실제 권력은 샤가 임명한 이란 총독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파비 정부는 카헤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토착 인구를 유목 투르크멘인 부족으로 대체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동시에 다게스탄 산악인들이 카헤티 변경 지역을 공격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1659년, 카헤티인들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수만 명의 투르크멘인을 카헤티에 정착시키려는 사파비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카헤티는 여전히 이란의 정치적 통제하에 있었고, 봉기의 세 명의 귀족 지도자들은 항복하여 처형되었다. 몇 년 후, 카르틀리의 바흐탕 5세 샤-나와즈는 무슬림 조지아 왕이자 카르틀리의 발리로서 샤의 허가를 받아 아들 아르칠을 카헤티의 왕/발리로 임명할 수 있었다. 한동안 동부 조지아의 두 왕국은 샤-나와즈와 그의 아들 아래 사실상 통일되었고,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이란의 침략으로 파괴된 그레미 대신 텔라비를 수도로 삼은 아르칠은 재건 계획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유망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르칠의 카헤티 즉위는 두 바그라티오니 가문, 즉 아르칠이 속한 무흐라니 가문과 카헤티의 테이무라즈 1세에게서 왕관을 빼앗긴 카헤티 가문 사이의 경쟁의 시작을 알렸다.
1677년부터 1703년까지 바그라티오니 왕조는 카헤티 왕위를 잃었고, 카헤티는 다시 직접적인 사파비 통치를 받게 되었다. 카헤티 가문은 마침내 이슬람으로의 배교를 대가로 1703년에 스스로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사파비 종주국의 뜻에 따라 통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왕국은 끊임없는 다게스탄의 침략으로 계속 괴로워했다.
1724년부터 1744년까지 카헤티는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연이은 점령을 받았다. 그러나 카헤티 공작 테이무라즈 2세가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에서 이란의 나데르 샤에게 제공한 공헌은 1743년 카헤티가 이란 궁정에 지불한 무거운 조공을 무효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744년,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나데르는 테이무라즈 2세에게 카르틀리 왕국을, 그의 아들 에레클레 2세에게는 카헤티 왕국을 수여했다. 두 군주는 1745년 기독교 전통에 따라 즉위했다. 그들은 1747년 나데르의 암살 이후 이란의 혼란을 이용하여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그들의 통치는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경제는 부활하기 시작했으며, 다게스탄의 공격은 감소했지만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 테이무라즈가 1762년 1월 8일에 사망했을 때, 에레클레가 그 뒤를 이었고, 그리하여 거의 3세기 만에 처음으로 동부 조지아를 단일 국가로 통합하여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8]
5. 18세기 카헤티
1724년부터 1744년까지 카헤티는 오스만과 이란에 번갈아 점령당했다. 그러나 카헤티의 테이무라즈 2세가 이란의 나데르 샤에게 협력한 덕분에 1743년 카헤티는 이란에 바치던 과중한 공물을 면제받았다. 테이무라즈 2세는 나데르에게 협력하여 카르틀리와 카헤티 양쪽에서 권력을 확보하고, 자신은 카르틀리의 왕, 아들 에레클레 2세는 카헤티의 왕으로 승인받았다. 1745년 두 군주는 모두 기독교 전례에 따라 즉위했다.
1747년 나데르 샤가 암살된 후, 이들은 이란의 혼란을 틈타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들의 통치 아래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다게스타니의 공격은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762년 1월 8일 테이무라즈 2세가 사망하자 에레클레 2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거의 3세기 만에 처음으로 동조지아는 단일 왕국으로 통일되었다.[8]
5. 1. 다게스탄의 침입
1610년대 중반, 샤 아바스 1세는 조지아를 사파비 제국에 더 확고하게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재개했고, 1614~1617년에 반복되는 침략으로 카헤티를 종속시켰다. 조지아의 계속되는 폭동과 이란의 보복으로 6만~7만 명이 살해당했고, 10만 명 이상의 카헤티인 소작농들이 이란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카헤티 인구의 2/3가 줄어들었다. 그레미와 자게미와 같이 한때 번성했던 도시들은 작은 마을로 위축되었고, 농업은 쇠퇴했으며 상업은 중단되었다.[7] 1648년 테이무라즈 1세는 카헤티에서 축출되었다. 사파비 정부는 카헤티를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토착 인구를 유목민 터키 부족들로 대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같은 시기에 다게스탄 산지 사람들이 카헤티 국경 지대를 공격하고 식민지화를 시작했다.1659년, 카헤티인들은 집단 봉기를 일으켜 유목민들을 학살하고, 카르틀리의 무슬림 왕 바흐탕 5세 샤흐-나와즈에게 나라를 넘겼다. 바흐탕 5세는 샤의 허락을 받아 자신의 아들 아르칠을 카헤티 왕으로 즉위시켰다. 잠시 동안 동조지아의 두 왕국은 샤흐-나와즈와 그의 아들 아래 사실상 통합되었고, 상대적 평화가 지속되었다. 아르칠은 이란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그레미 대신 텔라비를 수도로 삼고 재건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르칠의 즉위는 무크라니 가문과 테이무라즈 1세의 등장으로 왕위를 빼앗긴 카헤티 왕가의 경쟁을 촉발시켰다. 카헤티 왕가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대가로 1703년에 왕위를 되찾았고, 사파비 종주국으로서 통치했다. 그러나 왕국은 끊임없는 다게스탄의 침입으로 고통받았다.
1724~1744년에 카헤티는 오스만과 이란에 번갈아 점령당했다. 그러나 카헤티의 왕자 테이무라즈 2세가 이란의 나디르 샤에게 협력한 덕분에 1743년 카헤티는 이란에 바치던 과중한 공물을 면제받았다. 테이무라즈 2세는 나디르 샤에게 협력하여 카헤티와 카르틀리 양쪽에서 권력을 확보하고, 자신은 카르틀리의 왕으로, 아들 에레클레 2세는 카헤티의 왕으로 승인받았다. 1745년 두 군주는 모두 기독교 전례에 따라 즉위했다. 1747년 나디르 샤가 암살된 후, 이들은 이란의 혼란을 틈타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들의 통치 아래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다게스탄의 공격은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762년 1월 8일 테이무라즈 2세가 사망하자 에레클레 2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거의 3세기 만에 처음으로 동조지아는 단일 왕국으로 통일되었다.[8]
5. 2. 오스만과 이란의 점령
1610년대 중반, 샤 아바스 1세는 조지아를 사파비 제국에 더 확고하게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재개했고, 1614~1617년에 걸쳐 반복된 침략으로 카헤티를 종속시켰다. 조지아의 폭동과 이란의 보복이 이어지면서 6만~7만 명이 살해당했고, 10만 명 이상의 카헤티인 소작농들이 이란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카헤티 인구의 2/3가 줄어들었다. 그레미, 자게미와 같이 한때 번성했던 도시들은 쇠퇴했고, 농업은 위축되었으며 상업은 마비되었다.[7] 1648년, 테이무라즈 1세는 카헤티에서 축출되었다. 사파비 정부는 카헤티를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토착 인구를 유목민 터키 부족들로 대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같은 시기에 다게스타니의 산지 사람들이 카헤티 국경 지대를 공격하고 식민지화를 시작하였다.1659년, 카헤티인들은 봉기를 일으켜 유목민들을 학살하고, 카르틀리의 무슬림 왕 바흐탕 5세 샤흐-나와즈에게 나라를 인도했다. 샤흐-나와즈는 아들 아르칠을 카헤티의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샤흐의 권한을 획득했다. 당분간 동조지아의 두 왕국은 샤흐-나와즈와 그의 아들 하에 사실상 통합되었고, 상대적 평화가 지속되었다. 아르칠은 이란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그레미 대신 텔라비를 수도로 삼고 재건 계획을 실행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잠시뿐이었다. 아르칠의 즉위는 무크라니와 테이무라즈 1세의 등장으로 왕위를 빼앗긴 카헤티 왕가의 경쟁을 야기했다. 카헤티 왕가는 1703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왕위를 되찾았으나, 왕국은 다게스타니의 침입에 계속 시달렸다.
1724~1744년에 카헤티는 오스만과 이란에게 연속적으로 점령당했다. 그러나 테이무라즈 2세가 이란의 나데르 샤흐에게 협력한 덕분에, 1743년 카헤티는 이란에 대한 과중한 공물 진상을 면제받았다. 테이무라즈 2세는 나데르에게 협력하여 카헤티와 카르틀리 양쪽에서 권력을 확보하고, 자신은 카르틀리의 왕, 아들 에레클레 2세는 카헤티의 왕으로 승인받았다. 1745년 두 군주는 기독교 전례에 따라 왕관을 썼다. 1747년 나데르 샤흐가 암살되자, 이들은 이란의 혼란을 틈타 독립적인 통치자로 자리 잡았다. 이들의 통치는 나라의 안정에 기여했다.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다게스타니의 공격은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762년 테이무라즈 2세가 사망하자 에레클레 2세가 그를 계승하여, 동조지아는 거의 3세기 만에 단일 왕국으로 통일되었다.[8]
5. 3. 독립 회복과 통합
1610년대 중반, 사파비조의 아바스 1세는 조지아 복속을 위해 1614~1617년에 카헤티를 침략했다. 조지아의 폭동과 이란의 보복으로 6만~7만 명이 살해당하고 10만 명 이상의 카헤티인 소작농들이 이란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카헤티 인구의 2/3가 줄었고, 그레미, 자게미 등 번성했던 도시들은 쇠퇴했으며, 농업과 상업도 위축되었다.[7] 1648년 카헤티의 테이무라즈 1세는 축출되었고, 사파비조는 카헤티를 엄격히 통제하며 토착민을 유목민 터키 부족으로 대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다게스타니 산지 사람들도 카헤티 국경 지대를 공격했다.1659년 카헤티인들은 봉기를 일으켜 유목민들을 학살하고, 카르틀리의 바흐탕 5세에게 나라를 인도했다. 바흐탕 5세는 샤흐의 허가를 받아 아들 아르칠을 카헤티 왕으로 즉위시켰다. 동조지아의 두 왕국은 사실상 통합되었고, 평화가 지속되었다. 아르칠은 텔라비를 수도로 삼아 재건에 착수했으나, 무크라니와 카헤티 왕가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카헤티 왕가는 1703년 왕위를 재건했으나, 다게스타니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1724~1744년 카헤티는 오스만과 이란의 점령으로 종속되었다. 테이무라즈 2세는 이란의 나데르 샤흐에게 협조하여 1743년 카헤티의 공물 진상을 무효화했다. 그는 카르틀리와 카헤티 양측의 권력을 확보하고, 아들 에레클레 2세를 카헤티 왕으로 승인받았다. 1745년 두 군주는 기독교식으로 왕관을 썼고, 1747년 나데르 암살 이후 독립 통치자로 확립되었다. 경제는 재생되었으나 다게스타니의 공격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1762년 테이무라즈가 죽자 에레클레가 계승하여 동조지아는 단일 왕국으로 통일되었다.[8]
참조
[1]
서적
Edge of Empires: A History of Georgia
[2]
서적
Edge of Empires: A History of Georgia
[3]
서적
The Fifteenth-Century Bagratids and the Institution of Collegial Sovereignty in Georgia. Traditio
[4]
서적
Ibid
[5]
서적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2nd edition
https://archive.org/[...]
"[[Indiana University Press|Indiana University Press]]"
1994
[6]
서적
Ibid
[7]
서적
Ibid
[8]
웹인용
Georgia (II): History of Iranian-Georgian Relations
https://web.archive.[...]
"[[Encyclopædia Iranica|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2009-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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